Tank boy

Melchers Travel Agency - Time for a family vacation?











광고 한 편 좀 찍어 보겠다고 

날밤을 깐다. 악을 쓴다. 억을 써댄다.

일반에게는 우리는 몰상식한 사람들이다.

기껏 15초, 길어야 30초짜리 찍는데 뭐 그리 바쁜 척이냐는 눈치다.


처음 남편과 연애를 시작했을 때 늘 바쁘다며 약속을 펑크내는 나를 의심했다고 한다.

자기가 싫으면 싫다고 할 것이지. 일 핑계를 대냐며 약이 올랐단다.

그래서 한 달간 매일매일. 그는 퇴근과 동시에 회사 앞 카페에서 나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매일을 한결같이 밤에 퇴근하는 나를 보고서야 빈말이 아니었구나 했단다.

덕분에 노처녀 팔자를 타고난 사주를 용케 뒤엎고 결혼했지만 

아직까지도 남편에게 나의 삶은 미스터리다.

"요즘 카메라가 얼마나 좋아졌는데, 그냥 1시간이면 다 찍겠구먼!"하면서

궁시렁~궁시렁~광고회사 다니는 여편네를 둔 자신의 팔자를 저주한다.


아이들에게 바쁜엄마는 익숙한 존재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그런 모습만 봤기 때문에 늘 그러려니 한다.

10시에 와도 일찍 왔다며 반가워하고

몇 달 전부터 잡아놓은 약속이 돌연 취소되어도 뭐 그러려니 한다.

엄마 대신 아빠가 밥하는 모습이 낯설지 않고

유치원이나 학교 행사에 엄마가 안 가도 뭐 그러려니 한다.


이번 겨울 방학에도 나는 양치기 엄마 였다.

일은 왜 항상 몰아서 오는지

늘 하는 아이, 안 하던 아이, Stop된 아이까지 광고를 시작하면서

12월, 휴가와 공동연차가 붙은 그 꿈의 휴일이 모두 날라가 버렸다.

덕분에 아이와의 찬란했던 방학 일정도 함께 날라가 버렸다.

해외 여행의 꿈은 애저녁에 물건너 갔고

아이의 친구 가족들과 떠나기로 약속되어 있던

송어 잡이 여행도 엄마 없는 아이마냥 아빠와 둘만 갔다 왔다.

올해는 꼭 스노우 보드를 가르쳐 주겠다는 엄마의 호언장담은 늘 그렇듯 뻥으로 끝났다.

이번 방학 땐 공부보다 추억을 만들자며

학원 스케줄도 시원하게 뺐는데 구들장 빈둥대는 추억만 늘려줬다.

덕분에 친정 엄마는 아직까지 말 못하고 기저귀 못 뗀 줄때에 

방학한 첫째까지 삼시세끼를 해먹이느라 

효도관광이나 하며 여유로운 여생을 보내야 할 나이에

딸내미와 함께 덩달아 야근모드로 고생이 늘어졌다.

늘 일을 하다 보면 가족은 이순위로 밀린다.


몇 달 전부터 잡아놓은 가족 스케줄은 

전날에 갑자기 생긴 업무 스케줄에 무 자르는 것 보다 쉽게 잘려 나간다.

업무 전화는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받으면서

회의 중에 가족 전화는 언제나 <나중에 걸겠습니다>이다.


오늘도 나의 컴퓨터 모니터는 각종 파일로 쓰레기장이다.

일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욱 쑥대밭이 되고

아이들이 해맑게 웃고 있는 바탕화면 위로

파일들이, 문서들로 덮여진다. 가려진다.


 Time for a family vacation?


아름다운 와이키키 해변보다,

휘황찬란한 뉴욕의 밤거리 보다,

이 투박하고 멋 없는 여행사 광고가 내게 울림을 주는 이유다.


바둑 만화 <미생>에 이런말이 나온다.

<그래 봤자 바둑! 그래도 바둑!>

우리의 삶도 그런 게 아닐까?

카피 한 줄, 그림 한장에 난리를 쳐도 소비자 눈엔 별 차이 없는,

리모컨으로 휙휙~돌려 버리고 마는 소위 선전.

하지만 우리에게 광고는 15초로 축약된 하나의 우주다.

광고주의 수많은 요구 사항과 복잡한 시장 상황,

집 한 채 값의 제작 비용, 수 많은 사람들의 고민과 노력 끝에 태어난 우주다.

그래서 우리는 야근을 한다.

이 모든 것을 허투루 할 수 없어서

오늘도 답이 없는, 하지만 답을 내야 하는 외로운 싸움을 한다.